딱히 기억하고 싶은 한 해가 된 것 같지는 않지만
내가 나중에 나의 삶을 돌아보고 싶은 순간이 왔을 때, 기억의 조각 몇 개는 쥐어주면 좋으니까 남겨본다.
그리고 연말이 되어서야 비로소 조금 더 열심히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반성의 의미이기도 하다.
회고 템플릿을 사용해볼까, 30초 정도 고민하다가 그냥 두서없이 생각나는 걸 주절거리기로 했다.
이 글 너무 가독성이 좋으면 안 될 것 같음
#번아웃
2022년에는 이직이라는 업적을 이루었지만, 올해는 나 뭐했지?
특별히 엄청 의미있는 프로젝트를 진행하지도 일을 열심히 하지도 않았다.
진행할 수 있는 과제 중에 욕심나는 프로젝트도 별로 없었고 내가 받아온 프로젝트를 적당히 하긴 했지만 최선을 다했냐? 하면 그렇지 않다.
번아웃인가? 싶을 때쯤 내가 뭘했다고 번아웃이야? 한 번도 불태운 적도 없는데 라는 생각을 했는데
그게 번아웃이라고 한다. 이 번아웃은 올해 내내 나를 붙들어 놓고 있었다.
나는 스스로 스트레스로부터의 회복 탄력성이 좋다고 생각했는데, 궁극적인 원인을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결국 무력감만 느낄 뿐 회복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단점이라고 한다면 상응하는 장점이 있기 때문에 내가 선택한 일이기 때문에 책임을 다 해야 했다.
그래서 정말 최소한의 책임만 다하지 않았나 싶다.
#직무 현타?
3년차면 온다는 직무에 대한 현타일까?
나는 여전히 이 일에 재미를 느끼고, 이 일을 못해먹겠으니 다른 일을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내가 이 경력에 투자한 매몰비용 때문일까? 라고 정신을 차리고 자기객관화를 하고 봐도 결론은 달라지지 않는다. 뭐 매몰비용보다는 직무 전환을 위한 추가 비용이 매우 센 것도 있지만... 그 비용을 감당할 만큼 다른 하고 싶은 일이 있지도 않음. 이거는 하고 싶어서 선택한 거고 지금도 여전히 하고 싶어? 라고 물어본다면 여전히 하고 싶다.
그런데 직무에 대한 현타가 오지 않았냐고 한다면? 그것도 아니긴 하다. 이 일은 밑도 끝도 없이 비난 받기도 쉽고, 권한은 없으면서 책임만 생기기도 쉽다. 불평하면 길어지니 줄여야지. 그래도 여전히 나는 이 일이 잘 맞다고 생각하니까.
#기획 커뮤니티?
동일 직무의 다른 사람들과 공감대를 형성하며 유대감을 만들어 나가면 어떨까? 그런 커뮤니티...는 기대되지 않는다. 직무 특성상인지 사람들이 늘 돈 벌 궁리를... 하기도 하고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 난 수익을 창출할 수 있어야 지속 가능하다는 강한 믿음이 있기 때문에)
무엇보다 사람들이 일하는 환경이 몹시 상이하기 때문에 공감대 형성을 이루기가 쉽지 않다. 기획자는 보통 조직에 자신의 일하는 방식을 맞추게 된다. 결국 너무 많은 변수 속에 자신에게 가장 적합한 방법을 찾아가는 혼자만의 싸움이지 않나 라는 생각.
권한도 책임도 도메인도 프로덕트도 다른 사람들이 나눌 수 있는 해결책에는 한계가 있다. 기획자들은 개발자나 디자이너 처럼 무언가를 구현하는 job이 아니다 보니 상황에 적합한 결론을 짜내는 것은 온전히 자기 몫이다. 다른 사례를 참고하려다가도 제대로 알려면 알아야 하는 배경이 한 바가지이다. 도움을 애써 구한다고 하더라도 나의 배경과 현재 상황을 모르고 우리 제품에 대한 이해가 없는 사람에게 얻을 수 있는 조언은 한계가 있다. 나는 어쩌면 커뮤니티 불신자인지도...
문서를 아예 쓸 줄 모르겠거나, 개발자와 어떻게 일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혹은 이거 다 제가 하는 게 맞나요?! 이런 질문을 가진 사회초년생 같은 경우에는 도움을 얻을 수 있겠으나... 나는 콧대 높게도 이미 그 시기는 지나와버렸다.
아니면 어쩌면 peak of mount stupid에 있는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그럴 확률이 높겠지?
나중에 이런 냉소적인 시기를 지나면 커뮤니티에 나가볼 지도 모르겠다. 뭐 궁금한 컨퍼런스는 몇 개 있었는데 다 못가게 되어서 네트워킹을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구만? 요즘은 사람들 만나는 것에 딱히 흥미를 못 느끼는 것 같다.
#빌런?
올해는 뭔가 직장생활에서 굳이 겪을 필요 없는... 빌런과 일하는 소중하지 않은 경험을 했다.
지금까지의 협업 카운터파트는 정말... 다들 좋은 사람들이었다는 생각을 하며
온실 속의 화초로 영원히 남고 싶지만 사회는 나에게 충분히 상냥하지 않았다.
뭐 사실 빌런은 어느 조직에나 있기 마련이고, 전 직장에서도 겪긴 했었다.
다만 그 때의 경우 내 편에 서서 함께 싸워주는 사람들이 많았고, 그래서 빠르게 문제가 해소되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모두 그가 문제라는 걸 알고 있지만 아무도 함께 싸우지 않았을 뿐이다.
뭐 그를 문제라고 인식하는 사람들의 역할이 달랐기 때문일 지도.
나는 어려서부터 늘 조직에서 비합리적인 걸 참지 못하고 말하고 싸우는 편이었고,
그래서 늘 참았다면 + 다른 사람들은 참기 때문에 굳이 겪을 필요 없는 갈등을 사서 만들고 그 후폭풍을 온몸으로 맞는 사람이었다.
어릴 때도 이에 대한 현타를 많이 느꼈었는데 ("난 왜 남들 다 참는 걸 못 참고 꼭 한 마디 해서 갈등을 만드는 걸까 그냥 좋게 좋게 지나갈 수 있었는데 굳이 왜 문제를 수면으로 드러내는 걸까")
그냥 비뚤어진 성격을 고치지 못한다는 걸 받아들이고 대충 살고 있다.
하여튼 이런 일들을 충분히 겪었기 때문에 알고 있다.
(1) 다른 사람과 내가 생각하는 우선순위가 같지 않을 수 있고,
(2) 내 편이라고 생각하는 동료가 내 앞에서만 그런 말을 하는 것일 수도 있으며 - 이는 진심일 수도 아닐 수도
(3) 심지어 진심으로 나를 지지한다고 해도 결코 조금도 나서지 않는 선택을 할 수 있다.
사실 동료들이 나를 지지하도록 스스로 나서는 것은 내가 설득해야 하는 몫이다.
그들이 움직이지 않았던 것은 내 주장이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도 그냥 내 선에서의 최선을 다 했지 굳이 끌어들이고 싶지 않기도 했다. 그 만큼의 열정이 있지도 않았고 나에게도 그들에게도 피곤한 일이었으니까.
보통 그들은 오히려 눈 앞에 일어나는 갈등에 훨씬 스트레스를 얻는 사람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싸우는 것이 가져오는 결과가 그들에게 이득이든 손해이든 당장 눈 앞의 갈등이 더 피로했을 것이다.
난 사실 내 합리적인 선택을 위하여 그 동료들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사람이었을 테니 그들에게는 내가 빌런일 수 있겠지?
아무리 내가 스스로 해결하려고 했고, 조력을 크게 기대하지도 않았음에도... 나 혼자 계속 싸우고 부정적인 말을 하고 반대하는 일은 이런 모난 성격의 나조차도 너무나 지치는 일이었다.
조력자가 아예 없지는 않았지만, 사실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에 끝까지 챌린지를 시도하는 정신 나간 사람이 나밖에 없었던 것 같기도 하고... 이상한 정치가 상황에 결합되어 있기도 했고 외부에서는 모종의 압력도 있었고... 커뮤니케이션 비용의 낭비는 정말 끔찍했다.
결국 나도 협업을 포기하고 그 조직을 나와 더 이상 일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지만(현실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가장 해피 엔딩 아닐까?)
지금 보니 올해의 모든 열정과 일에 쓸 수 있는 감정소모를 여기 다 써버린 것 같기도 하다.
물론 나는 독립투사 같은 것도 아니고 대단한 개혁을 꿈꾼 것도 아니다. 나도 직장이란 공간에서 멤버 하나로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다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내가 다른 동료들보다 낫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난 그 조직에서 싸우기만 했지 결국 내 역할을 충분히 잘했냐면 그렇지 않다. 오히려 저런 감정소모에 열을 다 낸 다음에 할 수 있는 업무에는 더 소홀했을 지도 모른다. 여기서의 업무 퀄리티에는 스스로도 아쉬움을 느끼면서 부딪히기만 한 걸 뭘 잘했다고 할 수 있을까. 그냥 성격 탓에 잔뜩 싸우기만 하고 시간만 흘려 보낸 스트레스와 낭비의 나날이었다. 최고로 비생산적. 울적하군...
#마지막 잎새?
사회성도 생산성도 자기효능감도 모두 바닥을 치는 한 해이다. 공부도 안 했고... 하기도 싫고... SQLD는 땄지만 그런 것으로는 나의 자기효능감을 채울 수 없다는 사실만 분명해졌다. 직장인인 나에게는 참 좋지 않은 한 해였다. 그냥 한 가지 위안이 될 만한 것은 그래도 올해를 돌아볼 의욕이 생겼다는 것. 심지어 자기 평가를 할 때조차 제대로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연말 막바지인 지금 뭔가 해보려는 몇가지 시도들을 고민해보고 있다. 올해의 나는 딱히 좋은 동료가 아니었겠지만 내년의 나는 다시 볼 수 있게끔 더 나은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일적인 부분 외에서는...
오히려 일에서 못 채우는 정신적인 결핍을 채우기 위해서인지 문화생활을 꽤 많이 했다. 영화관을 자주 갔고, 콘텐츠를 진지하게 소비하며 즐겼다. 나는 사실 게임을 참 좋아하고 이제껏 평생 게임을 즐겨왔는데 직장생활 시작하고 부터는 영 즐기지 못했다. 솔직히 일에 지나치게 과몰입이지 않았나 싶다. 정말로 취미가 하나도 없었다. 술 마시며 일 얘기하기 밖에 안 했음 이제는 게임기도 사고 스팀에서 게임도 잔뜩 사고 하나씩 까보면서 재밌게 놀고 있다. 나는 사실 좋아하는 것이 일 외에도 참 많았다. 음악도 좋아하고, 아이패드로 그림 그리기도 좋아하고, 애니도 좋아하고, 소설도 좋아하고, 만화도 좋아하고, 그냥 일반 문학도서나 비문학 교양 책도 좋아한다.
운동도 시작했다. 이제껏 한 운동 중에서 PT를 가장 긴 횟수로 했고, 하키도 몇 번 시도해보았고, 이상한 무술도 배우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인바디에는 전혀 변화가 없지만 그래도 운동을 좀 더 잘하게 되었다. 여행도 다녔다. 제주도도, 부산도, 여수도 다녀오고 집을 좋아하는 것치고는 열심히 여기저기 돌아다녀 보고 있다. 직장동료랑 낚시도 해보고, 친구들이랑 실탄 사격도 해보고, 키보드 윤활도 해보고, 늘 그렇듯 아이유 콘서트와 페스티벌도 다녀오고. 내년에는 해외로도 몇 번 나가보려고 한다.
직무 공부에는 소홀했지만 그래도 영어 공부는 다른 때보다 조금 더 시도해보았다. 영어는 항상 내 마음 속 열등감 덩어리인데, 이걸 해소하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하는 내가 기특해. 내년에는 전화여어를 더 열심히 하고 아이엘츠를 한 번 공부해볼까 싶기도.
일은 대충했다고 하면서 일적인 부분 외에서는 꽤나 열심히 즐겼다.
하지만 일에만 집중하던 때보다 (극심한 스트레스가 있었음에도) 내 정신 건강은 좀 더 회복되었다. 당시에는 나름 일에서 자기효능감을 꽤 느끼고 있었음에도. 그 때의 몰입은 일로써 나와 삶을 증명하고자 하는 도피 행각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여전히 나는 나의 인생 phase에서 그 때의 main job을 잘 해내고 싶은 욕망이 크다. 일은 항상 내 삶에서 중요한 주제이고, 여기서 얻는 즐거움이 이 일로 버는 단순한 돈 보다는 가치가 커야 한다고 생각한다.
스트레스로부터 벗어난 지 몇개월이 지나니 슬슬 뭔가를 해보고 싶다는 의욕이 든다. 해 볼 생각이야!
나는 연간 목표에 큰 의미를 두지 않으니 연간 소망을 적어보려고 한다.
내년에 한 해를 돌아볼 때는 내가 좀 더 즐겁고 신나게 이 글을 쓰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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